3. 명령법에서의 지나친 공손함

상대를 어떻게든 떠받들기 위해 평서문에서는 ‘-시-’를 남용하는 표현이 등장했는데, 명령문에서는 상대를 떠받들기 위해 어떻게 하고 있을까?

전통적으로 상대 높임의 격식체는 ‘해라, 하게, 하오, 합쇼’의 네 등급으로 나눠진다고 하는데, 격식체의 명령문을 중심으로 예문을 만들면 (7)과 같다.

하지만 인간 관계라는 것이 딱 4가지 등급으로만 나눠질 리가 없기에 언중들은 ‘-시-’를 이용해서 (8)과 같이 상대 높임 표현의 등급을 세분해 왔다.

‘오시게’는 ‘오게’보다는 상대를 대우하지만 ‘오오’보다는 덜 대우하는 표현이다. 명령문에서는 말을 듣는 청자가 행위의 주체이기도 하므로 주체 높임의 ‘-시-’를 넣음으로서 청자/주체를 더 높이고 덜 높이는, 반 등급 높은 중간 단계의 대우 표현이 가능해졌다.

동남 방언에서는 이와 방식은 다르지만 선어말 어미를 이용한 상대 높임 표현이 존재한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31700004.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1226pixel, 세로 421pixel

특이한 것은 (9나)의 ‘-이-’는 표준어의 (8)에서 쓰인 ‘-시-’와는 전혀 다른 기능을 한다는 점이다. (8)의 ‘-시-’는 평서문, 의문문에서도 사용되는 온전히 ‘주체 높임’의 표지이고, 그것이 명령문에서 용법 그대로 ‘상대 높임’을 보완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그에 비해 (9)의 ‘-이-’는 평서문, 의문문에서는 사용되지 않으며 즉, ‘주체 높임’의 표지로는 쓰이지 않으며 오로지 ‘상대 높임’만의 표지로만 쓰인다. 그러기에 (9가)처럼 ‘-시-’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현대 국어 표준어에서 상대 높임은 ‘종결 어미’를 통해서만 표현되지만 동남 방언에서 상대 높임이 ‘선어말 어미’를 통해서 실현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마치 <표2>의 중세 국어의 상대 높임 선어말 어미와 비슷하다.

(7가)에서 보듯이 명령문에서 가장 높은 등급에 붙는 종결 어미는 ‘-ㅂ시오’이고 (8가)에서 보듯이 여기에 ‘-시-’를 넣어 ‘-십시오’를 쓰면 그보다 더 높이는 표현이 된다. 고객과 민원인을 대하는 직종의 사람들이 고객과 민원인에게 다음 (10)와 같이 말해야 할 경우가 있다.

(10)에서 ‘-시-’를 뺀 ‘앉읍시오, 걸어봅시오, 받읍시오’ 등은 문법적으로 틀리지 않으나 현재는 쓰지 않는 표현이 되었다. ‘앉읍시오’에 ‘-시-’를 넣어 상대를 더욱 더 높이고, 대우하고, 공경하는 의도를 드러내어야 하는데, ‘-시-’가 포함된 ‘앉으십시오, 보십시오, 받으십시오’ 등 ‘-십시오’ 자체가 기본형이 된 상황에서 상대를 극도로 높인다는 서비스직 종사자의 의도는 어떻게 드러나는가? 다음 그림 속 한 국어 교사의 푸념에서 ‘-실게요’라는 표현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3170b967.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1440pixel, 세로 748pixel

(10가)와 (11가)를 비교해 보면 (10가)의 표현에 아무런 문제가 없음에도 (11가)가 더 부드럽게 들린다. 부드럽게 들리기 때문에 공손해 보인다. 그러나 ‘커피 나오셨습니다.’가 비문이듯이, ‘-실게요’라는 표현도 비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2인칭 주어를 전제로 하는 명령의 표현에 1인칭 주어와 호응하는 약속의 표현 ‘-ㄹ게’가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커피 나오셨습니다’가 서비스직 종사자들이 일부러 문법을 틀리려는 의지의 산물이 아니듯이 ‘여기 앉으실게요’ 역시 서비스직 종사자의 본래 의도는 아니다. 다음 그림과 같은 과도한 갑질에 의해 강요된 궁여지책인 것이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37a80006.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79pixel, 세로 181pixel

이 그림은 하나의 풍자에 지나지 않지만 ‘갑질’과 ‘감정 노동’으로 대표되는 ‘과도하게 대우받으려는’, ‘과도한 공손함을 요구하는’ 현대의 세태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과도하게 대우받고, 과도하게 공손함을 요구하는 사람들(주로 고객이나 민원인)은 아무리 높임의 표현이 제대로 쓰였더라도 ‘명령 받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그것을 알기에 언중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명령하지 않고 명령하는 말투’를 개발하게 된다. 그것이 ‘약속법’의 종결 어미인 ‘-실게요’이다.

‘-실게요’는 본래 ‘-ㄹ게’에서 온 말이다. 특이한 것은 ‘-ㄹ게’와 ‘-ㄹ게요’ 같은 비격식체에는 이 종결 어미가 자연스레 사용되는데 ‘격식체’의 경우 ‘-ㄹ게’에 대응하는 자연스러운 종결 어미가 없다는 점이다. 굳이 찾는다면 <표3>처럼 ‘-겠-’이나 ‘-을 것’ 정도가 대응될 것 같다.

주어가 1인칭인 경우 ‘-ㄹ게’는 약속법이 된다. 그러나 주어가 2인칭인 경우 ‘약속’이라는 개념 자체에 모순이 되므로 저절로 비문이 된다. 그런데 격식체에서 ‘-ㄹ게’에 대응한다고 보았던 ‘-겠-’이나 ‘-을 것’은 주어가 2인칭이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만 이때에는 ‘약속’의 의미는 사라지고 미래라는 시간 표현만 남게 된다.

<표3>과 <표4>에서 격식체와 비격식체의 최고 등급 둘을 비교해 보자. 아래 <표5>에서 보다시피, 1인칭 주어의 약속법인 경우 격식체에서는 ‘-겠-’이 자연스럽고 ‘-을 것’은 ‘약속’의 의미가 약화되고 ‘미래’라는 시간 표현이 강조된다. 2인칭 주어의 약속법인 경우 비격식체는 아예 비문이 되는 반면, 격식체에서는 ‘약속’의 의미가 약화될지언정 비문이 되지는 않는다. 1인칭과 달리 이때 ‘-겠-’보다는 ‘-을 것’이 자연스럽고, ‘-겠-’은 ‘미래’보다는 추측에 가까워진다.

이를 통해 (11)과 같은 ‘-실게요’의 의미를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면, ‘(당신이) 여기 앉으실게요.’는 약속의 의미가 아니라, ‘(당신이) 여기 앉으실 겁니다.’에 대응하는 비격식체 문장인, ‘(당신이) 여기 앉으실 거예요.’라는 ‘미래’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표현은 “당신이 여기 앉는 일이 벌어질 텐데, 그 일을 실현시키는 것은 당신에게 달려 있다.”라는 점을 공손하게 전달하여 상대방에게 명령하지 않고, 상황에 대한 주도권과 선택권을 상대방에게 넘겨줌으로써 고객이나 민원인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는 화법이다.

이렇듯 명령하지 않고 상대가 할 일을 미리 말해 줌으로써 상대에게 행동을 요구하는 화법에는 다음 (12)와 같은 표현이 더 있다.

‘사물 존대’나 ‘-실게요’와 같은 문법 파괴는 막아야 하지만 무작정 그것을 쓰지 말라고만 하기도 어렵다. 앞서 인용한 기사에서도 현재 상황을 (13)과 같이 분석한다.

“이쪽으로 오세요.”, “여기 앉으세요.”라고 말했다가 “어디서 손님한테 명령이야?”라는 어이없는 질책을 들은 판매원은 다음 번에 울며 겨자먹기로 “이쪽으로 오실게요.”, “여기 앉으실게요.”라고 말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판매원의 높임 표현을 탓하기 전에 고객으로서 또는 민원인으로서 상대방에게 공손함을 과도하게 강요한 적은 없는지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원글 전체 보기: 부산한글38집(클릭)

제목: 지나친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

목차 1. 사물 존대와 ‘-시-’의 지나침
           2. 높임법 이외의 영역에서 지나침
           3. 명령법에서의 지나친 공손함
           4. 문법 교육의 지나친 현실 추수